나는 30년 차에 접어드는 50대 중반의 프리랜서 개발자이다.
50대 중반에 특별히 이뤄놓은 것 없이 여태까지 남이 주는 월급을 받아 생활해야 하는 개발자인 것은 좀 슬픈 일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직까지 나를 필요로 하여 개발자로 써먹는 회사가 있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기도 하다.
어느 업종이든 비슷하겠지만 50대 중반이면 이제 직장 생활은 거의 말년이라고 볼 수 있다.
직장에 처음 들어가서 첫 십여년은 성장하는 시기이다. 열심히 배우고 배운만큼 성장하고 사회적 인맥을 넓혀간다. 개인차가 있겠지만 성장하는 시기를 잘 보낸 사람의 다음 십여년은 성장한 만큼의 달콤함을 맛보게 된다. 제법 높아진 연봉에 주머니가 넉넉해 지기도 하고 독립하여 자신의 사업 역량을 펼쳐 보기도 한다.
나 역시도 비슷한 과정을 거친 것 같다. 운이 좋게도 처음부터 원하는 회사에 들어가 엄청난 능력자들과 일한 덕에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고 내 개발 능력치도 더불어 많이 향상되었다. 마흔이 되기 전에 마음이 맞는 몇 친구와 회사를 만들어 5~6년 만에 직원 수 30여명의 결코 작지 않은 회사로 키우기도 했었다.
수입도 많이 좋아져서 집도 넓히고 차도 바꾸고.. 이대로 10년만 더 벌면 노후에 일 안하고 먹고 살수는 있겠다고 생각할 무렵, 재미있게도 그때부터 회사가 어려워지기 시작했던 것 같다. 결국 애매한 나이인 40대 후반에 다시 혼자가 되어 출발선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길고 깜깜한 터널의 시작.
주변에서는 이 기회에 좀 쉬며 여행이라도 다녀오라고 말하곤 하지만 사실 그게 쉽진 않았다. 쉬는 것이나 여행을 다녀 오는것은 일상이 보장되었을 때나 즐거운 것이다. 미래가 불투명한 상황에서 맘 편히 어떻게 여행을 즐길 수가 있겠는가. 1년을 쉬게 될지 10년을 쉬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마음은 늘 불안하고 조급했다.
집에만 있을 수도 없어 막상 나가면 특별히 갈데도 없다. 누굴 만나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몇 달 지나고 나면 사실 만날 사람도 별로 없다. 만나봐야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옛 동료 중 몇 명은 예의상일지는 몰라도 내가 잘하는 일과 조금 결이 다르지만 자기 회사서 같이 일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하는 경우도 있었다. 염치 불구하고 땡큐 외치며 들어가기에는 내 양심과 알량한 자존심이 허락치 않았다. 일을 못해서 폐를 끼치더라도 모르는 회사에서 폐를 끼쳐야지 아는 사람의 회사에서 폐를 끼쳐서는 안된다는 생각이었다.
다시 창업을 해볼까도 생각했었지만 짧게 고민하고 바로 포기했다. 이미 경험했던 분야는 문제점을 가장 잘 알기에 다시 시작해도 어렵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고 다른 분야의 창업은 준비기간이 너무 부족했다. 급한 마음에 준비없이 시작했다가 한번 더 넘어지면 그땐 돌이키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되었다.
결국 당장 가장 안전한 해결책은 취업 밖에 없었다. 구인/구직 사이트에 프로필 올리고 구인 공고 몇군데에 지원도 해보았다. 어려울 거라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훨씬 처참했다. 나이도 많고 심지어 개발을 안한지도 몇 년이 지난 사람을 개발자로 채용하기는 내가 담당자라도 어려울 거라 납득은 되었다.
이 무렵, 헤드헌터에게도 제법 연락을 받았었는데 내가 알고 있는 헤드헌터와는 좀 많이 달랐다. 메신저나 메일로 인터뷰를 진행하다보니 일단 이 분야에 대한 전문성이 너무 떨어졌다. 무엇보다 그분들의 프로필을 보니 대부분 헤드헌터를 시작한지 얼마안되는 초짜가 많았다.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짐작해 볼때 아마 나와 같은 처지에 있던 분들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개발자로 재 취업은 어렵고 그나마 회사 다닐때 알던 사람들 있으니 필요로 하는 회사와 잘 연결만 시켜주면 건 당 얼마씩 벌 수 있어 혹해서 시작했을 것이다. 얕은 인맥 바닥나고 나면 구인/구직 사이트 뒤져서 할 수 밖에 없을텐데 나도 보고 남들도 보는 사이트에서 얼마나 성과를 내겠는가. 나역시 아무 도움도 못받았고 다시는 헤드헌터와 인터뷰를 진행하지 않았다.
길었던 기다림 끝에 마침내 다시 취업.
10개월 가량 백수였던 것 같다. 입사 지원한 곳은 연락이 없고 별도움 안되는 헤드헌터나 보험회사, 다단계 같은 회사에서만 연락이 왔었다. 무직 상태로 6개월 정도가 넘어가면 이런 회사의 면접도 한번 가볼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사람이 쪼그라든다. 통장 잔고에 빨간 불이 들어올 무렵, 놀랍게도 입사 지원도 하지 않았고 아는 사람도 전혀 없는 어떤 회사의 간부에게서 연락이 왔다. 평소 내가 운영하던 블로그와 SNS를 통해 나를 간접적으로 아는 분이었고 내가 해왔던 분야의 기술이 자신의 회사에서 개발하는 프로젝트에 잘 맞을 것 같아 연락을 한 것이었다. 구독자가 20~30명에 불과한 보잘 것 없던, 그나마 몇 년동안 포스팅 없이 방치해 놓았던 내 블로그를 통해 이런 기회가 생기다니 인생 참 재미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비록 연봉은 거의 반토막이었지만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제안을 받아들이고 마침내 개발자 생활을 다시 한번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
나이 먹고 새로 취업을 하고 보니 그동안 몰랐던 어려움이 있었는데, 글이 너무 길어지는 것 같아 다음 글로 넘긴다.
핑백: 나이 많은 개발자가 새로 취업하면 겪게 되는 일